산은 산이 있는 곳에 있다
연말 회고인지 새해 다짐인지 뭔지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는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은 게임 중 하나다. 10년 전쯤 대학 합격 발표가 나던 순간에도 문명을 하고 있었고(아버지가 방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결과 나온 줄 알았다) 5년 전쯤 대학원에 다닐 때도 매일 새벽 4시까지 문명을 하고 남은 시간에 논문을 썼다(룸메를 깨우지 않으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이패드로 했다). 그런 만큼 몇 년 전 시드 마이어가 자서전을 냈을 때 사서 읽어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디자인 문서에 비이성적으로 집착하며 코드 한 줄도 쓰기 전에 전체 게임을 텍스트 문서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에 담아서 보여주길 기대하는 관리자도 있다. 하지만 그건 마치 어떤 지역에 가보기도 전에 “여기에 산이 있을 것이라고 정했어.”라며 지도를 그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만든 디자인 문서를 루이스와 클라크가 들고 나타난다고 해도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들이라면 “곧 답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고 걷기 시작할 것이다. 산은 산이 있는 곳에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산을 찾는 것이지, 산이 어디에 있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다. (…) 적어도 내가 찾아내기 전까지는 내 게임에도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실수가 무서워 주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어떤 기능을 넣을까 말까 몇 시간씩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게임에 넣고 확인한 후에 별로면 삭제한다. 탐험해보기 전에 지도부터 만들거나 게임 제작에 돌입하기 전에 작업 전체를 아우르는 예술적 비전부터 세우지 않았다. 매일 조금 더 나은 결과를 내기 위해 그저 한결같이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어떤 결과물이 탄생할지 알게 될 때까지 늘 최대의 효율을 추구했다.
처음 읽었을 때 이 부분은 직업적인 철학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게임 개발자는 아니지만 데이터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적합한 방법론에 기반한 효율적인 가설 설정과 검증의 반복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이며, 반대로 결론을 정한 다음 데이터를 입맛대로 끼워 맞추는 것이 최악의 방식이라고 아직도 믿는다.
그런데 올해는 일할 때 말고도 이 문장들이 상당히 자주 내 머릿속에 맴돌았고 어느 순간부터 닮고 싶은 삶의 방식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참 별일 없었던 해이기도 했고, 어떤 면에서는 이직이나 이사처럼 상대적으로 큰 사건들이 있던 해이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이전까지 어떤 방식으로 미래를 보고 의사결정을 해 왔는지를 많이 생각해보게 됐다. 지금까지의 나는 대체로 지도가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불확실성을 싫어했고 내가 어느 시점에 어떤 것을 얻을지 늘 알고 있기를 바랐다. 문제는 삶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미래에 대해 지도를 그린다는 건 결국 내 머릿속의 그림대로 뭐든 흘러가야 한다고 ‘우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내 성향은 종종 나를 원치 않는 환경에서 오랫동안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었고, 어떨 때는 눈앞에 있는 걸 두고 불필요할 만큼 과도하게 조급한 태도로 고통 받게 했다. 올해를 돌아보면 그런 순간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래서 이 추구미를 추구미로만 남겨놓지 않기로 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잘못되는 경우의 수를 세는 데 시간을 쓰지 않기로 한다. 내가 장기적으로 되어야만 하는 어떤 상태, 이뤄야 하는 무언가를 상정하지 않기로 한다. 뭐든 작게 시도해보되 멈추는 것에도 과감해지기로 한다. 무엇보다 다른 모든 해들과 다르게 거창하거나 기나긴 새해의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한다. 참고로 이번 주에 회고 모임에서 쓴 PPT의 새해 목표에는 짤 3개만 넣었다.
새로운 일에 적응하기. 돈 모아서 대출 갚기. 그리고 강한 몸…
당장 나에게 필요한 목표들이고, 대부분 깊은 고민이나 구체적인 세부 계획 없이도 달성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이다. 물론 그냥 되는 건 아니고 의지력과 노력은 당연히 필요하다. 아, 그 외에는 올해 100편의 영화를 보고 70권의 책을 읽었는데 2025년에도 딱 이 정도로만 볼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건 목표는 아니고 그냥 바람이다.
올해 제법 괜찮은 스코어가 기록된 내 DB
아무튼 이게 목표라면 목표다. 그냥 이 순간에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기(해봤는데 별로면 말기).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발이 산부리에 툭 걸리지 않을까. 산은 원래 산이 있는 곳에 있고, 그걸 찾아내는 게 즐거움이니까.